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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의 가슴 뭉클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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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문사 작성일2016.05.22 조회3,9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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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의 가슴 뭉클한 사연 소록도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K목사 앞에 일흔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섰습니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K목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제발” 그저 해본 소리는 아닌 듯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K목사는 무언가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모두 열 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자리를 권하여 앉자, 노인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아이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언제 이야기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그 아이가 11살 때였지요.” “......”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를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죠.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 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만 겁니다. 그러다 어느 산 속 그늘 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나는 문득 잠이 든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 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만 나는, 마주 서있는 아들에게 내 심경을 이야기했지요. 고맙게도 아이가 이해를 하더군요.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 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거의 내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 녀석이 소리를 지르지 않겠어요? 내게는 가슴높이였지만, 아들에게는 턱밑까지 차올라 한걸음만 삐끗하면 물에 빠져 죽을 판인데,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 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 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그 후 소록도로 아들을 떠나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올라와 살자 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펴 주면 드러누워 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가 생각이 났지만 얼마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입을 엽디다.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렸죠. 그런데 사정은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어요. 둘째, 셋째, 넷째--….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열한 살에 문둥이가 되어 소록도라는 섬에 내다버린 아이, 내손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끝내는 문둥이 마을에 내팽개치고 40년을 잊고 살아왔던 아이, 다른 아홉명의 아이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대학까지 마쳐 놓았지만, 내다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 버렸던 아이...... 다시 또 먼 길을 떠나 그 아이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 더 늙어 보이는,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 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게 내다 버린 채 한 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 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아아!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목사님!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음성 나환자촌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 애는 내가 여기 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 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 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아홉명의 아이들에게선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언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 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생각이 깊은 사람들- 이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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