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사의 선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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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의 등불, 선지식의 법향(法香)

깨달음의 길을 먼저 걸으신 큰 스님들의 지혜가 우리 삶의 올바른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창건주 회정스님

창건주 회정스님

보문사와 관련한 각종 자료는 회정(懷正)이라는 법명의 스님을 창건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 때의 수행승이었던 회정스님이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보문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모든 자료는 스님이 이곳의 산명(山名)과 사찰명을 직접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관음신앙을 중시하고 있었음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각종 사서류(史書類)나 주요 불교문헌에는 회정스님과 관계된 내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신라 때에 생존했던 스님 가운데 회정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은 단 한 분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문사의 창건주인 회정스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기는 무척 어려운 상태라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보문사의 창건을 서술하는 자리에서 언급되었던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고려 시대인 12세기에 동일한 법명을 지닌 스님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스님이 금강산 보덕암을 중창하였을 뿐 아니라 관음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 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특히 보덕암과 관련된 내용에는 회정스님이 겪은 관음신앙 영험담이 다수 실려 있어 눈길을 끈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서는 일단 조심스럽게 보문사의 창건주인 회정스님과 보덕암의 중창주인 회정스님을 동일인으로 보고자 하며, 보덕암에 관계된 자료를 통해 회정스님의 일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보덕암의 회정스님과 관계된 자료는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 등에 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보덕굴사적습유록(普德窟사적습유록)〉·〈보덕굴연혁(普德窟沿革)〉이라는 자료 속에 회정스님과 관계된 내용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물론 이들 내용은 다분히 설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이를 통해 회정스님과 관음신앙 그리고 보문사와의 상관관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아 한 가지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회정스님의 관음영험담

회정스님의 관음영험담

고려 의종(毅宗)때의 일이다.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위에 자리 잡은 송라암(松羅庵)에서 관음기도를 올리는 한 승려(회정대사)가 있었다. 관음탄신일인 2월 19일부터천수주력 (千手呪力)으로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하고자 지성으로 발원하였다. 3년 기도를 마치는 날 밤 꿈속에 백의(白衣)의 한 노파가 나타나 말하기를 "관음진신을 친견하려가든 해명골(解明谷, 지금의 楊口郡, 方山面)에 몰골옹(沒骨翁)과 해명방(解明方)이 살고 있을 것이니 찾아가 보라."고 하였다. 꿈에서 깬 회정대사는 해명골을 찾아가다가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노인에게 묻되, "혹시 이 고을에 몰골옹이 살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노인은 대답하되, "내가 바로 몰골옹이오."라고 말하면서 반가이 맞이하는 것이었다. 하룻밤을 같이 자며 찾아온 사연을 말하였더니 그 노인은 해명방의 집을 가르쳐 주었다. 회정은 몰골옹의 말대로 그를 찾아갔는데 해명방은 없고 묘령의 처녀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회정대사를 반기면서 말하기를 "어디서 오신 스님입니까? 해명방을 무슨일로 찾으시는지요."라고 하니, 그가 찾아온 뜻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처녀는 "해명방은 나의 아버지인데 성품이 급하고 칼날 같아서 무슨 말이든지 순종을 해야지 만일 그렇지 않고 비위를 거슬리기만 하면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고 하였다.

이윽고 해명방이 나무짐을 짊어지고 오더니 눈을 부릅뜨며 말하기를 "너는 누구인데 남의 집 과년한 딸애와 어울려서 수작을 하느냐?"고 하며 지게 작대기로 마구 때리는 것이었다. 회정은 그래도 아무 변명을 하지 않고,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잘못을 용서하여 주십시오"하고 무조건 사과하니 해명방은 "이놈, 담이 크구나.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부득이 내 사위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딸에게 물 한 그릇을 가져 오게 하고는 그 자리에서 혼례를 치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웃방을 신방(新房)으로 정해주기까지 하였다.

회정은 마굴(魔窟)에 빠진 것 같아서 아무 흥미와 이렇다 할 애정도 없이 47일을 지낸 후 장인인 해명방에게 "고향으로 보내주십시오. 잠깐 다녀오겠습니다"고 하였더니, 해명방은 "그 문수(文殊, 몰골옹을 가리킴)란 영감이 공연히 너에게 내 집을 가리켜 주어서 남의 딸만 버려 놓았구나. 가고 싶거든 어서 빨리 가거라."고 하였다. 회정은 다시 몰골옹에게로 가서 말하니 그는 회정을 보고 "그대는 보현보살(해명방)과 관음보살(해명방의 딸)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해명방은 보현보살이요, 네 처는 곧 관음보살의 진신인 것을...."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깜짝 놀란 회정은 해명방에게로 다시 찾아갔더니 집도 없고 해명방과 그녀도 없었다. 회정은 발길을 돌려 몰골옹을 찾아갔으나, 역시 그의 집도 몰골옹도 없었다.

회정은 생각다 못해 금강산으로 다시 돌아와 관음보살을 만나게 해 달라고 3,7일간 기도를 했는데 기도 회향날 밤 꿈속에 백의부인이 나타나서 "네가 오늘 만폭동(萬瀑洞)에 올라가면 관음진신을 다시 만날터이니 가보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회정이 아침 일찍이 만폭동의 폭포수를 끼고 올라가는 도중이었는데 해명방의 집에서 같이 살던 딸, 즉 그의 아내가 개울가에서 머리를 감고 있지 않은가. 하도 반가와서 "여보, 여보, 당신이 여기서 무얼하는거요."하고 달려갔으나, 그녀는 파란 새(觀音鳥)가 되어 훨훨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회정은 미친 듯이 그녀를 뒤쫓아 가다가 물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울같은 물(影娥池) 속에 산 언덕이 비치고 그곳에 여자와 굴(窟)문이 비쳐 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머리를 돌려 쳐다보니 그녀가 굴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회정은 반가움에 칡넝쿨을 헤치며 허우단심 올라갔더니 그녀가 굴문 앞에서 반가이 맞아 주었다. "지날달 해명골에서 47일 동안 저와 한이불 속에서 같이 살던 인연은 백겁천겁이라도 만나기 어려운 인연입니다. 앞으로도 기도정진을 지성으로 하십시오. 모골옹은 문수보살의 화신이요, 해명방은 보현보살의 현신인데, 스님은 보덕(普德)화상의 후신이요, 나는 항상 이 굴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스님뿐만 아니라 인연이 있는 이가 찾아오면 그 인연을 따라 몸을 나타내 보일 것입니다."라는 말은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회정대사는 크게 느낀 바 있어 그곳 석벽에 `상주진신 관자재보덕굴(常住眞身 觀自在普德窟)'이라 새겨 놓았다. 그는 바위 초암을 지어 삼백일간 용맹기도 정진을 하니 마침내 원통삼매(圓通三昧)를 성취하였던 것이다.

비록 설화적인 내용이지만, 위의 글을 통해 회정스님의 면모는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우선 회정스님은 금강산 지역에서 수행에 전념하신 분이었으며, 고구려 보덕화상의 후신이라고 인식될 만큼 당시 사회에서 상당한 위상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수·관음·보현의 세 보살을 친견할 정도로 뛰어난 수행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관음신앙에 남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금강산 보덕굴은 진신관음(眞身觀音)이 상주하는 관음성지로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뛰어난 수행력을 바탕으로 관음보살을 친견했던 회정스님이 또 하나의 관음성지를 가꾸고자 보덕암을 떠나 이곳 강화도로 왔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여하튼 보문사의 창건과 회정스님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보다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근대불교의 고승 박한영 스님

한국근대불교의 고승 박한영 스님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질곡을 헤쳐 나온 한국불교는 일제가 자행한 식민지 불교정 책에 의해 또다시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일본은 한편으로 한국불교를 크게 장려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말살시켜 갔으며 결국은 한국불교를 완전히 예속시키기 위한 정책을 시행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에 의해 한국불교는 또다시 심한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갔지만, 몇몇 선각자들의 불교운동을 통해 이 시대 불교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갈 수 있었다. 박한영(朴漢永, 1870∼1948)스님은 바로 이러한 선각자 가운데 한 분이었다. 스님은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에 강하게 맞서 싸운 불교 운동가였으며, 한국불교의 미래는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불교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불교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스님은 백용성(白龍城, 1864∼1940)·한용운 (韓龍雲,1879∼1944)스님과 함께 일제시대의 한국불교를 지켜낸 3대 선각자로 꼽히고 있으며, 근대 불교교육의 가장 으뜸가는 선구자로 오늘날까지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한영스님이 보문사의 중창을 기뻐하며<보문사법당중건기>를 작성해 주었다는 사실은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까지 전하는 자료만 본다면, 한영스님이 보문사와 어느 정도의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문사에서 중창을 기념하는 글을 스님께 부탁했다는 사실, 그리고 스님이 그 청을 수락하고 흔쾌히 글을 써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보문사와 스님의 관계는 보통 이상이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영스님은 보문사의 역사 속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으며. 여기서는 이 같은 점을 염두에 두면서 스님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한영스님은 1870년 8월 18일에 전북 완주군 초포면에서 태어났다. 성은 박씨였으며, 자(字)는 한영(韓永), 호는 영호(映湖) 또는 석전 (石顚)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박성용(朴聖鏞)이라는 함자를 가진 분이었으나 스님이 어렸을 때 이미 돌아가시고, 주 로 어머니 진주 강(姜)씨 밑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자 가세는 매우 빈한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스님의 어린시절도 동생들을 돌보며 농사일을 하는 등 매우 어려 웠다고 한다. 하지만 스님은 워낙 총명한 기질을 타고났으며,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학문에 게으름이 없었다. 그 결과 불과 17세의 어린 나이로 마을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 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렇게 성장하던 스님이 왜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스님이 17세가 되던 해(1886년)에 스님의 어머니께서 전주 위봉사(威鳳寺)에서 금산(錦山)스님에게 삶과 죽음에 관한 생사법문을 듣고 그 내용을 전해 주었으며, 스님이 그것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는 내용은 전해지고 있다. 이로 본다면 스님은 아마도 청년기에 어머니로부터 생사법문을 전해 듣고 곧바로 수행자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 19세가 되던 1888년에 스님은 전주 태조암(太祖庵)으로 가서 금산스님을 은사로 하여 출가의 예를 마쳤다. 이때 받은 법명이 정호(鼎鎬)였다. 이어 21세에 장성 백양사(白羊寺)·운문암(雲門庵)의 환응(幻應)스님에게 4교(四敎, 능엄경·기신론 ·금강 경·원각경을 말함)를 배웠으며, 계속해서 23세에 선암사(仙巖寺)의 경운(敬雲)스님 에게 대교(大敎, 화엄경·선문염송·전등록 을 말함)를 배웠다. 그리고 26세에 순창 구암사(龜巖寺)의 처명(處明)스님으로부터 법을 이어 받았는데, 이때 영호(映湖)라는 호와 석전 (石顚)이라는 시호(詩號)를 함께 받았다. 특히 `석전'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백파(白坡)스님에게 후일 백파스님의 법손 가운데 도리를 아는 자가 있으면 이 호를 주라고 부탁했던 것인데, 그것이 계속 전해지다가 한영스님에 와서 시호로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대의 고승들로부터 상당한 칭송을 듣던 한영스님은 1896년에 구암사에서 강의를 시작한 후 대흥사·백양사·해인사·법주사· 화엄사·석왕사·범어사 등지를 거치면서 불법을 강론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에 불교유신의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한용운· 금파(琴巴)스님 등과 더불어 불교유신운동을 펼쳐 가는데, 그 활동은 1911년이 되면서 본격화 된 다.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 이회광(李晦光)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승려와 일본인들 사이에 연합동맹이 체결되자. 스님은 만해스님 등과 함께 한국불교의 전통을 수호한 다는 취지로 임제종(臨濟宗)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후 스님은 1913년에 해동불교(海東佛敎)라는 잡지를 창간하면서 불교유신과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는 글을 계속 발표하였다. 아울러 1914년부터는 본격적인 불교 교육사업에 매진해 나갔다. 1914년에는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이 설립되어 이에 관계하였으며, 1916년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이 설립되자 여기서도 강의를 하는 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1926년부터 개운사 (開運寺)에 강원을 설립하여 이후 20여 년간 수많은 인재 를 배출해 냈으며, 1931년에는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 하기도 하였다. 그야말고 일제라는 암흑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을 교육 사업이라고 판단했던 스님의 뜻이 줄기차게 실행 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스님은 광복이 되자 이후 몇 년간 한국불교를 영도하는 최고의 자리를 맡게 된다.

광복 이후 새롭게 조선불교 중앙종무원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스님은 이 자리에서 게1대 교정(敎正)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이후 3년간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던 스님 은 세수 79세를 일기로 정읍 내장사(內藏寺)에서 입적하였다. 한영스님은 한국 근대불교사에 있어 큰 별과도 같은 존재였다.

일제에 끝까지 타협 하지 않았던 높은 기개는 물론이지만, 그분이 지녔던 학식의 폭과 깊이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탁월한 것이었다. 불교 이외에 역사·유학·노장사상·서법(書法) 등까지도 달통했던 한영스님이 남긴 글로는《석전문초(石顚文抄)》·《석전시초 (石 顚詩抄)》·《석림수필(石林隨筆)》·《석림초(石林抄)》 등이 있으며,《해동불교 》·《조선불교월보》등의 잡지에 실린 글도 상당수 전하고 있다.

아울러 최근에는 스님이 남기신 글을 모아《영호대종사어록(映湖大宗師語錄)》(동국출판사, 1988)이 라는 책자가 출간된 바 있다.

현대의 선승 춘성선사

현대의 선승 춘성선사

춘성(1891~1977) 스님은 강원도 설악동 출생으로 1903년 백담사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을 스승으로 출가하여 석왕사 대교과 수료 후 신흥사와 석왕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이후 만공 월면 스님의 법을 이어받아 평생을 무소유와 탈속의 무애도인으로 사신 근대의 대표적 고승이자 1960년대 후반 보문사 회주로 주석하며 절의 사격을 높인 선승이십니다.

춘성스님을 말할 때는 흔히 그의 기행(奇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은 본래 스님은 여러 경전을 두루 읽어 박식했고 또 글재주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만공선사의 문하에 들어가 화두를 받는 과정에서도 만공선사가 춘성스님에게 "스님은 너무 문자 에 밝으니 화두를 줄 수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스님은 갖고 있던 경전을 전부 버리고 이후부터는 내심자증(內心自證)에만 몰두하고 사교입선(捨 敎入禪), 곧 교를 버리고 오로지 선에 열중했다고 한다. 이후 스님은 수행에 몰두하는 한편 다른 몇몇 사찰에서 주지를 역임하면서 대중을 교화하엿다. 6·25 때는 혼자 빈 절이 된 의정부 망월사(望月寺)를 지켰고 전쟁 뒤에는 절을 중수하기도 했다. 그 뒤로도 망월사를 비롯 강화도 보문사 등 여러 절의 회주 또는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중수하고 학인을 가르치며 중생을 교화하였다. 스님은 스승 만해처럼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천성을 지녀 거침없는 기행과 걸림없 는 두타행을 많이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것은 곧 스님의 탈속(脫俗)의 경지가 다른 선사(禪師)에 비해 월등함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스님에 얽힌 일화도 많다. 그 하나는 스님이 백담사에서 용운스님을 스승으로 모실 때인 1910년 8월의 일이다.

그 무렵은 흉년이 계속되었고 당시에도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어느날 마침 하늘에서 비가 시원스레 소나기가 내릴 때였다. 당시 만해스님은「불교유신론」집필로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더니 춘성스님 이 발가벗은 채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른바 탈속 무애의 경지요, 활연 대오를 내보인 셈이었다. 용운스님은 다시 한 번 춘성스님의 재질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기뻐했다고 한다. 또 한가지 일화는 6·25가 끝나고 망월사를 중수할 때의 일이다. 당시 망월사는 거의 폐허가 되어 스님은 절 주위의 소나무를 베어 재목으로 쓰고 있었는데. 그러다 나무를 함부로 벌목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적발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경찰서 측의 질문에 예의 걸쭉한 욕이 섞인 육두문자와 잇단 선문 답(禪問答)으로 일관, 결국 조사하던 경관을 탄복시키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풀려나기도 했다.

스님은 또한 아무 때 어느 곳에서라도 헐벗고 돈 없는 사람들을 보면 그 자리에서 입은 것 가진 것을 전부 주어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이 누구와 말하더라도 늘 욕하면서 말하곤 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다.

그래서 스님을 `욕쟁이 스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러나 스님의 그같은 말이 곧 탈속과 무애의 경지에서 나온 것임을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면에서 스님의 진면목을 찾게 되고, 또 스님에게 매료되기도 하였다. 결국 스님은 부처님의 참뜻을 받들어 무애 하게 살다 깨친 바대로 자유롭게 지내다 입적한 고승이었던 것이다. 스님은 1977년 8월 22일 세수 87세, 법랍 74세에 봉국사에서 입적했다. 열반식은 8월 24일 화계사(華溪寺)에서 서옹(西翁) 당시 종정 및 운허, 월산, 월하 스님 등 여러 큰스님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어 거행된 다비식에서 나온 사리와 재는 유언대로 서해바다에 뿌렸는데 사리는 매우 크고 영롱했다고 한다. 부도와 탑비는 현재 성남 봉국사(奉國寺)에 세워졌다.